아이디어를 파는 트렌스포머 디자이너, PRADA
서경대학교 무대의상연구소-
아이디어를 파는 트랜스포머 디자이너, 프라다
전 세계 수 많은 여자들의 동경의 대상, 명품 브랜드 프라다의 재탄생을 이끈 미우치아 프라다.
프라다 혁명이 있게 한 그녀의 우아한 이슈들을 준비했다.
"인형 옷 만들기 좋아하던 소녀 프라다"
전통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미우치아 프라다는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평범한 소녀였다.
집안 내 철저한 규칙을 지키되 그 안에서 취미생활을 즐겼다.
여느 소녀들처럼 어릴 적부터 종이인형이나 인형 옷 그리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색이며 분위기, 디자인 등 그 당시 그렸던 스케치 속에서
지금의 프라다 제품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단 사실.
"미우치아, 시위 행렬에 이브 생 로랑 스커트를 입고 나타나다"
미우치아는 남들보다 패션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패션 디자이너가 꿈은 아니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사회활동에 활발히 하면서 여러 차례 공산주의자 행진이나 시위에 참여했다.
그녀는 여느 여성 참가자들과는 다르게 이브 생 로랑이나 앙드레 쿠레즈 등
고가의 의상을 입고 참여앴고,
다음날 전국의 신문에 대서특필돼 화제와 조롱을 동시에 받았다.
이브 생 로랑은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그녀의 롤 모델이다.
메리 퀸트 역시 프라다에겐 없어선 안될 디자이너이다.
유독 팬츠보단 스커트를 사랑하는 미우치아는 짧은 길이의 치마 조차 입을 수 없었던
철저한 가정교육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눈을 피해 치마 밑단을 말아 올려 메리 퀸트의미니스커트를 연출했다.
"짝퉁(?) 사건으로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 프라다 부부"
미우치아의 인생의 동반자이자 프라다 CEO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커플 100인에 든 프라다 부부의 첫만남은
그리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었다.
1977년 미우치아는 프라다의 가방 디자인을 카피한 업체의 사장을 만나기
단단히 경고를 날리기 위해 한 박람회를 방문했고,
일명 짝퉁을 만든 장본인인 청년 실업가 베르텔리는 뛰어난 언변으로 그녀를 설득했다.
결국 두 사람은 동업 하기에 이르렀다.
서로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다독이며 둘을 연인 사이로 발전했고, 부부의 연까지 맺게 되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베르텔리는 미우치아에게 새로운 도전에 힘을 실어주며
프라다 여성복, 슈즈, 미우미우, 남성복, 속옷 등 다양한 라인으로 사업을 확장시켰다.
"가죽보호용 나일론으로 가방을 만든 역발상, 프라다를 일으키다"
미우치아에게는 파산위기에 놓인 프라다를 회생시키기 위해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다.
가죽전문이었던 프라다를 재탄생 시킨 핵심은 가죽이 아닌 가죽을 보호용으로 사용된 포코노 소재였다.
군수품 제작에 주로 사용됐던 나일론 소재의 포코노는 가볍지만 내구성이 뛰어나고 실용적이다.
냉담했던 첫 시장 반응은 금새 뜨거워졌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프라다의 첫 혁명을 이끌었다.
"미우미우는 그녀의 어릴 적 가상친구"
프라다의 세컨 라인인 미우미우는 미우치아의 애칭이자 어릴 적 가상친구였다.
미우미우는 어떤 옷이 좋은지 몰라서 하고 싶은 대로 스타일링을 시도하는
소녀들의 섹시하고자유로운 모습을 담았다.
리본, 양말, 볼드한 액세서리, 달콤한 파스텔 컬러 등을 활용해
바로 어릴 적 소녀 프라다가 입고 싶었던 옷을 미우미우를 통해 하나 하나 실현시키고 있다.
"프라다, 패션의 중심에서 건축을 외치다"
'프라다'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건축이다. 평소 예술, 특히 건축에 일가견이 있었던 미우치아는 프라다의 컬렉션 스테이지, 스토어,프로모션 등에 유수의 아방가르드 건축가들과 작업을 함께 했다. 특히 미우치아의 절친인 렘 쿨하스와 함께 2001년 뉴욕 소호에 첫 프라다 에피센터스테이지, 트랜스포머 인 서울 등을 작업했다. 초현대적인 신전과도 같은 이 곳에는 스위치에 따라 투명과 불투명을 오가는 가상 피팅룸과 저녁에는 공연장 또는 영화관으로 바뀌는 곡선형 무대, 그리고 시즌마다 바뀌는 그래픽 벽면 등 프라다의 예술 정신이 깃든 결과물들이 구석구석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