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IENNE WESTWOOD,용감무쌍한 패션 스피
-서경대학교 무대의상연구소-
당연한 얘기지만, 패션은 단순히 멋지고 예쁜 옷을 몸에 걸치는 행위가 아니다.
어떤 옷을 입느냐가 당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드러내니까.
역사와 전통에서 전혀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낼 줄 아는 그녀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런던 펑크 여왕의 이 용감무쌍한 패션 스피릿을 우리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라고 부른다.
Official Site |
www.viviennewestwood.co.u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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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 LABEL | Vivienne Westwood Gold Label Vivienne Westwood Red Label Vivienne Westwood Anglomania Vivienne Westwood MAN Label Vivienne Westwood Couture |
1941 |
4월 8일 더비셔에서 비비안 이자벨스웨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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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
17세에 가족들과 런던으로 이주. |
1962 |
21세에 데렉 웨스트우드와 결혼. 비비안 웨스트우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됨. |
1965 |
결혼 생활을 마치고 18세의 말콤 에드워드 멕라렌과 만남. |
1971 |
멕라렌과 킹스로드에 ‘Let it Rock’이라는 첫 번째 숍 오픈. |
1972 |
숍 이름을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살기엔 세월이 너무 빠르고, 죽기엔 너무 젊다)’ 로 리뉴얼. |
1974 |
숍 이름을 ‘Sex’로 바꿈. |
1976 |
숍 이름을 ‘Seditionaries(선동자들)’로 바꿈. |
1979 |
숍 이름을 ‘World’s End(세상의 끝)’로 바꾸고 현재까지 사용. |
1982 |
멕라렌과 함께 두 번째 숍인 ‘Nostalgia of Mud(진흙의 향수)’를 오픈. |
1983 |
메리 퀀트 이후 영국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파리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참가. |
1984 |
맥라렌과의 동업 관계에서 독립. 도쿄에서 ‘최고 5명의 디자이너’에 선택되어 하네모리, 캘빈 클라인, 몬타나, 그리고 지안코페레와 함께 컬렉션을 선보임. |
1986 |
카 를로 디아마리오(Carlo D’Amario)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매니징 디렉터를 맡으며 기업으로 성장하기 시작. |
1990 |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상’ 수상. 비엔나대학의 교수 역임. |
1991 |
1990년에 이어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상’ 수상. |
1992 |
비엔나에서 제자인 안드레아와 결혼. 버킹엄 궁전에 초대받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 로부터 훈장(O.B.E)를 수여받음. |
1993 |
여성복을 Gold Label과 Red Label로 나눔. |
1996 |
1월, 맨(Man) 라벨을 밀라노에서 론칭. |
1998 |
캐주얼 라인인 ‘Anglomania’ Label 론칭. |
1999 |
2월, 뉴욕에 처음으로 레드 라벨 숍을 론칭(Green Street). |
2000 |
런던 박물관에서 ‘Vivienne Westwood : The Collection of Romilly McAlpine’이란 타이틀로 전시회 개최. |
2004 |
빅토리아 & 알버트 박물관에서 34년 패션 작업 회고전. |
2006 |
‘New Years Honors(올해의 명예상)’에서 ‘Dame(기사에 상당하는 작위)’ 수여. |
2008 |
VW 37년간의 대표적인 작품이 수록된 ‘Opus Book’ 론칭. |
1950년대, 장난기 가득한 빨간 머리 소녀였던
비비안 이자벨 스와이어(Vivienne Isabel Swire)는 멋 부리는 걸 좋아했다.
교복을 커팅해 패셔너블한 펜슬 스커트로 변신시켰고,
당시 유행하던 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 스타일 롱 드레스를 직접 만들어 입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예술이나 패션과는 거리가 멀었던 집안 환경 탓에 17세 때까지는
미술책이나 영화를 접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1962년, 댄스 홀 매니저였던 데렉 웨스트우드(Derek Westwood)와 결혼하며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됐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3년 만에 파경을 맞았고,
1965년 그녀는 예술 학교 학생이었던 말콤 맥라렌을 만나 불 같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인생의 제2막이 열렸다. 맥라렌은 그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던졌다.
1971년 런던 킹스로드에 펑크족을 겨냥한 숍
'렛잇록 71(Let It Rock 71)'을 오픈하고 비비안에게 디자인을 맡긴 것.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과격한 문구의 티셔츠와 빈티지 아이템을 주로 팔았던
'렛잇록 71'에 금세 지루함을 느낀 두 사람은
1972년 '살기엔 너무 빠르고 죽기엔 너무 어리다(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리고 스피드를 즐기는 오토바이 족들을 위한 의상을 디자인했다.
이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숍의 이름과 콘셉트에 변화를 주며 영국의 패션 악동들을 유혹했다.
1974년 맥라렌은 당시 대중에게 터부시되던 '섹스(Sex)'를 숍 간판으로 내걸었다.
1976년엔 '선동가들-영웅을 위한 옷(Seditionaries-Clothes for Heroes)',
1979년엔 '세상의 끝(World's End)'으로 간판을 바꿨다.
'선동가들' 당시, 매장 내에서 살아 있는 쥐를 기르며 록의 저항 정신을 마음껏 뽐냈다.
비비안의 파트너 맥라렌은 이 시기 록 그룹 '섹스피스톨즈'의 매니저로 일하며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저항하자'던 그들의 사상을 공유했다.
가죽, 체인, 오토바이커 배지, 찢어진 의상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비비안은 이를 '구세대에 대항하는 영웅적인 시도'라고 일컬었다.
어둡고 반항적인 느낌에서 탈피, 과거로부터 로맨틱한 회상을 끄집어낸 숍이 바로 '세상의 끝'이었다.
현재까지 런던 킹스로드 430번가를 블링 블링하게 빛내고 있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이 숍엔 당시 제작했던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가 매달려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새로워지는 그녀의 패션처럼 말이다.
1981년 봄, 런던의 올림피아 전시장에서 첫 번째 컬렉션인 '해적(Pirate)'이 발표됐다.
18세기 해적 영웅들의 시대를 낭만적으로 재현해낸 쇼장은 대포 소리와 랩 뮤직으로 가득 찼다.
이 컬렉션은 그녀가 패션계에서 상업성과 스타성을 가진 디자이너로 인정받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역사와 전통 문화에서 현재의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82년 '야만(Savage, S/S)' 컬렉션에서는 서구 패션사에 파격으로 남을 비대칭 겹쳐 입기를 제안했다.
북미 원주민들의 문화에서 영감을 얻어 기하학적인 패턴의 이국적인 의상들을 선보였다.
같은 해 '버팔로(Buffalo, F/W)' 컬렉션에서는 페루 원주민 여성에게서 영감을 얻은
부푼 페티코트 스커트, 갈색 새틴 브라를 티셔츠 위해 덧입힌 파격적인 스타일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겉옷과 속옷의 개념을 과감하게 뒤집어놓은 이 컬렉션은 훗날 패션 역사에 일대 사건으로 기록됐다.
1983년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펑크 사상을 패션계에 전파했다.
이때 파리 오트 쿠튀르 쇼에 참가하게 됐는데, 영국 디자이너로서는 '미니스커트의 혁명가'로 불리는
메리 퀀트 이후 처음이라는 영광스런 타이틀도 함께 얻을 수 있었다.
같은 해 선보인 '마녀들(Witches)'이라는 컬렉션에서는
오버사이즈 재킷과 코트,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을 내놓았다.
격렬한 랩 음악과 기발한 효과로 드라마틱함을 강조한 이 쇼는 맥라렌과 웨스트우드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킹스로드의 패션꾸러기들을 흥분시켰던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디자이너로서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된 것은
패션보다 음악과 여배우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한 맥라렌과 멀어지면서부터다.
1984년 그녀는 자신의 재능에 스스로 화려한 날개를 달았다.
이 시기에 비비안은 현재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매니징 디렉터인
카를로 다마리오(Carly D'Amario)를 만나 이탈리아로 옮겨갔다.
도쿄의 네온사인에서 영감을 얻어 이탈리아 회사들의 로고와 형광 안료를 사용한 의상들을 선보인
'Hypnos' 컬렉션, 서부 영화 스타일에 대한 동경을 표현한 '클린트 웨스트우드' 컬렉션을 발표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개성과 창의력을 돋보이게 한 것은
1984년 10월, 파리에서 발표한 '미니 크리니(Mini-Crini)' 컬렉션이었다.
웨스트우드는 발레 <페트루시카(Petrushka)>에서 영감을 얻어 무겁고 엄숙한
빅토리아 시대의 유물인 크리놀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1987년 '해리스 트위드(Harris Tweed)' 컬렉션은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런던으로 돌아와 발표한 첫 작품이다.
트위드와 니트 등 영국을 대표하는 직물과 테일러링 기술, 여왕의 관, 대관식 케이프 등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요소들을 대거 등장시켰다.
그러나 존경과 근엄함 대신 예의 그 펑키함으로 영국의 전통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
이후 이어지는 그녀의 컬렉션은 '영국은 다신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Britain Must Go Pagan,
1988~1990년 연작 시리즈)', 영국 문학의 거장 H.G. 웰즈가 지은 공상 과학 소설의 제목에서 따온
'타임머신(Time Machine)', 화가 와토의 작품에서 가져온
1989년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Voyage to Cythera, F/W)' 등
문학과 예술, 전통에 대한 존경과 위트 있는 패러디들이 주를 이뤘다.
오래된 역사와 전통에서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힘이다.
런던 펑크 여왕의 놀랄 만한 감각과 사랑에 빠졌다면, 한 번쯤 시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 터.
그러나 선택지가 너무 많아 뭘 골라야 할지 모르는 펑크 초심자들을 위해 약간의 가이드 라인을 준비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섹시하고 쿨하며 펑키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골드, 레드, 앵글로마니아, 맨 등 레이블마다 차별성이 있다.
먼저, 여성 메인 라인인 골드는 여성스러운 실루엣과 영국 전통의 테일러링 기법이 만나 탄생했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특별하게 빛나고 싶을 때 꼭 맞는 이브닝 웨어들이 즐비하다.
레드는 여성 세컨드 라인이다.
골드보다 좀더 캐주얼하고 재미있는 옷들이 많은데, 그만큼 가격도 더 합리적이다.
트렌드보다는 고유의 개성을 가진 감각적인 패션 피플들에게 사랑받는 레이블.
앵글로나니아 레이블은 초창기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매 시즌 앵글로마니아 컬렉션은
1970년대부터 킹스로드에 깃발을 꽂았던 펑크 여왕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젊음과 반항을 데님, 저지 등의 소재로 캐주얼하게 표현해냈다.
남성복 메인 레이블인 맨은 포멀한 디자인과 럭셔리한 소재를 강조한 하이 패션을 추구한다.
옷감의 선택부터 소매 작업까지 독자적인 수작업으로 완성되는
네이비와 데님 소재를 많이 활용하는 캐주얼한 퍼플, 두 가지로 나뉜다.
'언제 어디서나 돋보이는 독창적 화려함'은 모든 레이블을 관통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만의 매력이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하위 문화였던 펑크와 록을 하이 패션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자,
존재 자체로 충분히 혁명적인 디자이너다.
올해 72세인 그녀는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새로운 패션을 창조하는 데 몰두했다.
영국인들은 그녀의 용감하고 대범한 펑크 패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창성을 넘어서 때로는 파괴적일 정도로 기발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아이디어는
영국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과 미래의 교류라는 그녀의 패션 철학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런 까닭에 1992년 버킹엄 궁전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O.B.E(대영제국 제4급 훈작사)를,
2006년 에는 DBE 작위(2등급의 작위급 훈장)를 수여받았다.
2003년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에서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회고전이 열렸다.
그녀가 제시하는 '영국 스타일'은 패션은 물론 음악과 미술 등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펑크였다. 하지만 이제 아무도 그녀의 끝을 예측할 수 없다.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패션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그녀는 계속해서 새롭고 또 새로워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