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EL, 우아한 숙녀의 품격
-서경대학교 무대의상연구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숙녀의 품격을 드러내기에 샤넬만한 브랜드도 없다는 걸.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세련된 것이라는 걸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증명해왔기 때문이다.
지구상 모든 여자들의 로망이 되어버린 샤넬.
그 우아한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Official Site |
www.chanel.com 샤넬 공식 뉴스 사이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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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 | CHANEL CHANEL HAUTE COURTURE | ||||||||||||||
Design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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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캉봉 가에 모자점 샤넬 모드 개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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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 도빌에 첫 부티크 오픈 |
1916 | 샤넬의 첫 의상이 <하퍼스 바자>에 소개 |
1921 | 샤넬의 첫 향수 샤넬 N° 5 출시 |
1924 | 샤넬 향수사 설립 |
1926 | 리틀 블랙 드레스가 패션의 필수품으로 등극 |
1934 | 특별 아틀리에를 열고 패션 액세서리 컬렉션을 선보임 |
1935 | 전 세계에 샤넬 의상을 판매 |
1939 | 샤넬 쿠튀르 하우스 문을 닫다 |
1954 | 파리 패션계에 컴백 |
1955 | 패션 모드 오스카상 수상, 샤넬 최초의 남성 향수 '뿌르 무슈' 출시 |
1959 | 샤넬 N° 5 향수병이 최고의 디자인으로 인정, 뉴욕 현대 미술관에 전시 |
1970 | 샤넬 N° 9 향수 출시 |
1971 | 가브리엘 샤넬 작고, 유작 컬렉션이 커다란 성공을 거둠 |
1975 | 샤넬 기초 메이크업 시리즈 샤넬 보떼 첫 출발 |
1978 | 샤넬 부티크와 액세서리의 프레타포르테 컬렉션 개최 |
1983 |
칼 라거펠트가 샤넬 하우스의 예술 고문을 맡아 컬렉션을 선보임 |
대부분의 성공 신화가 그렇듯, 샤넬의 시작 역시 화려하지 않았다.
1883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가브리엘 샤넬은 12세 때 고아가 되어 수녀원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바느질을 배운 그녀는 18세이 되던 1901년, 봉제 회사의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슴 뛰는 모험에 더욱 끌리는 여자였다.
낮에는 바느질을, 밤에는 캬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중 생활을 시작했다.
'코코가 트로카데로에서 누구를 만났던가?'라는 노래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손님들은 그녀를 향해 "코코!"를 외쳤다.
이때부터 가브리엘은 코코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서 샤넬은 부유한 젊은 장교 에티엔느 발상(Etienne Balsan)을 만난다.
그를 통해 프랑스 상류 사회로 가는 급행 열차를 타게 된 그녀는 당시 여성들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을 때 홀연히 승마 바지를 입고 경마장에 나타나 화제를 모았다.
이 승마복은 디자이너로서 그녀에게 영감과 가치관을 심어준 중요한 계기였을 뿐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내딛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발상의 별장에서 머물며 여유롭지만 지루한 생활을 하던 그녀는
자신 안에 꿈틀대는 변화의 욕망을 디자인으로 풀고 싶어했다.
그녀는 1910년, 27세가 되던 해에 피레네 산맥 북쪽 기슭에 있는 도시 포(Pau)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발상의 친구인 영국 폴로 선수 아더 '보이' 카펠(Arthur 'Boy' Capel)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 무렵 그녀는 파리에 자신의 숍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카펠은 그녀의 바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1910년 파리 캉봉 가(Rue Cambon)에 <샤넬 모드>라는 모자 전문점을 열도록 그녀를 열렬히 후원했다.
이후 샤넬은 자신의 이름 건 부티크를 곳곳에 오픈하기 시작했다.
1913년, 드디어 도빌(Deauvile)의 부티크에서 저지 소재를 이용한 여성 스포츠 웨어를 출시했다.
당시 코르셋과 페티코트에 얽매어 있던 여성들은 샤넬이 소개하는 신세계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고,
이들의 열광 속에 샤넬은 비아리츠(Biarritz)와 칸(Cannes)에도 부티크를 오픈했다.
프랑스 패션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녀는 카펠에게 빌린 돈을 다 갚을 수 있을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그녀는 든든한 지원군이자 연인이었던 카펠에게서 창조적인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고 했다.
그의 바지, 파자마, 밀짚모자와 재킷을 그녀만의 색깔로 재창조해낸 것.
샤넬은 당시 여성들을 옥죄던 꽉 끼는 코르셋 대신 실용적이고 심플한 의상을 만들어내며
여성들의 패션에 진보와 혁신을 가져왔다.
단순함에 섬세한 아름다움을 더한 샤넬 고유의 스타일은 곧 그녀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순박한 시골 아가씨 가브리엘 샤넬은 새로운 돌풍을 몰고 온 디자이너 코코 샤넬로 성공적인 첫 발을 내디뎠다.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패션계에 '심플함'의 매력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1916년, 미국의 <보그>는 샤넬의 옷들을 '세련미와 동의어'라고 소개했다.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동 시대 디자이너들의 작품과 적을 달리한 샤넬의 새로운 옷에 여자들은 열광했다.
이후 그녀의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샤넬이 만들어낸 실루엣은 1920년대를 풍미했다.
1921년, 그녀는 5월의 장미, 재스민, 알데하이드를 주원료로 하는 향수 '샤넬 N° 5'를 론칭했다.
당시 향수들이 시적인 이름을 붙이던 관습과는 반대로,
샤넬은 개발 순서에 따라 번호만으로 향수 이름을 붙였다.
다섯 번째로 개발된 향수 N° 5는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샤넬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최고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잠자리에서 무엇을 입느냐는 질문에
"몇 방울의 샤넬 N° 5"라고 대답한 일화는 샤넬 향수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직접 디자인한 로고 역시 샤넬의 철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는 영문 CHANEL을 단순한 산세리프체로 디자인한 워드마크다.
또 하나는 두 개의 'C'가 대칭으로 놓인 로고다.
검정색과 흰색이라는 가장 단순한 색의 대비와 완벽한 대칭성은
샤넬이 패션계에 던진 문제 의식과 궤를 같이 한다.
불편한 옷에서 여성을 해방시키고
단순하고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샤넬의 가치관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1926년에 그 유명한 '리틀 블랙 드레스'를 발표한 이후
장례식용으로만 치부했던 블랙 컬러는 불멸의 클래식이 되었다.
불필요한 장식을 생략하고 과감할 정도로 단순함을 추구했던 샤넬의 의상은
당시 여성들의 의복 문화에 혁명을 가져왔다.
스스로 걸어 다니는 모델과도 같던 코코의 날씬하고 우아한 외모도 인기에 불을 지폈다.
그녀만의 개성 있는 스타일과 확고한 패션 철학은 디자이너로서 샤넬의 위상을 더욱 드높였다.
1934년에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공장을 개설하고,
이듬해에 양장 전문점도 오픈하는 등 지속적인 성장을 이뤄나갔다.
그러나 1939년, 샤넬은 쿠튀르 하우스의 문을 닫게 되는 사건을 맞이한다.
4천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패션 대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노동자들이 인권 문제로 파업을 강행했고 때마침 제2차 세계 대전도 발발했다.
샤넬은 이후 15년간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나야만 했다.
1954년 당시 71세였던 그녀는 패션쇼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샤넬의 두 번째 혁명과도 같은 이 귀환을 통해 트리밍된
트위드 수트, 퀼팅 가죽의 2.55 백, 카멜리아, 투 톤 슈즈 등 주옥 같은 아이템들이 쏟아져 나왔다.
1955년 그녀는 미국 댈러스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로 패션 모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려면 언제나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패션을 창조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샤넬은 그렇게 다시 한 번 패션의 역사를 뒤흔들어 놓았다.
샤넬은 언제나 뜨겁게 살았고 또 사랑했다.
그녀의 연인들은 샤넬 디자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웨스트민스터 공작(Duke of Westminster)으로부터
그녀는 세일링 점퍼, 골드 버튼, 화이트 커프스, 트위드 재킷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져왔고,
디미트리 대공(Grand Duke Dimitri)에게서는
러시아 전통 블라우스인 루브시카(roubachka)를 비롯해 퍼 라인 코트와 자수에 관한 영감을 얻었다.
불 같은 사랑은 때로 그녀의 인생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녀가 패션계를 떠나 있었던 시기는 세계 2차 대전과도 맞물려 있었고,
샤넬은 독일 나치 장교와 사랑에 빠졌다.
결국 1944년 그녀는 나치독일에 협력했다는 비난에 시달리며
전후 수년간 스위스 로잔에서 위태로운 망명 생활을 보내야 했다.
다시 프랑스 패션계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샤넬은 자신의 일과 사람, 그리고 예술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동시대의 예술적 명사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작가 장 콕토(Jean Cocteau)와 화가 피카소(Picasso), 작곡가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등과 어울리며
그들의 예술 활동에 대한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1971년 1월 10일,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며 또한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뒤로 하고 샤넬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스타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83년 이후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가 샤넬의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고 했던 그녀의 말을 모두가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