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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 정도를 지키는 신사의 품격

-서경대학교 무대의상연구소-

 

 

 

 

 

비즈니스맨들의 상징이자 클래식의 정석으로 꼽히는 넥타이.

남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액세서리인 넥타이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완성되기까지

어떤 시간들을 거쳤을까?

프랑스에서 영국, 미국으로 건너가며 역사를 만들어낸 넥타이의 타임 라인.

 

 

01150400000000301_1.jpg 서경대학교 무대의상연구소 - 스타일닷컴

 

오늘 날 남자들의 패션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인 넥타이.

역사 속에서 넥타이가 등장했던 기록은 꽤나 오래 전부터 살펴볼 수 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릉에는 중국 최초의 전제 군주인 진시황을 호위하기 위해

실제와 비슷한크기로 제작된 7,000개 이상의 병마용들이 묻혀 있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비단 천을 목에 두르고 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로마에서는 칼날을 주고 받는 전투가 아닌 말로써 펼치는 언쟁과 연설들이

광장, 의회, 법원에서 자주 일어났는데, 이때 마치 칼을 보호하듯 성대를 소중히 보호하기 위해

파스칼리아(fascalia)라는 이름의 천으로 목을 감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서기 113년 로마의 황제 트라야누스는 현재의 루마니아인 다키아인에 거둔 승리를 축하하며 

각각 짧은 넥타이, 목도리, 그리고 매듭으로 된 천 조각,

이 세가지의 각기 다른 넥웨어를 착용한 2,500개의 동상을 기념비와 함께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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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대학교 무대의상연구소 - 스타일닷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넥타이를 처음으로 착용한 것은

1660년 루이 14세를 호위하기 위해 프랑스 왕궁으로 간 크로아티아 용병들이었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에 힘겹게 승리를 거둔 프랑스를 주축으로

여러 동맹군들은 자축을 위해 자신의 최정예병들을 파리로 파견했다.

이 때 크로아티아의 정예병들도 퍼레이드에 참여했는데 그들의 목에는 장병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가족들이 걸어준 장방형의 비단 천, 크라바트(cravat)가 묶여 있었다.

형형색색의 크라바트에 매료된 루이 14세는 그것을 왕실의 기장으로 삼고

왕실에 크라바트군을 창설하기까지 한다.

이때부터 크라바트는 귀족들에게 유행처럼 번져나갔고,

크라바트를 풍성하게 맬수록 맵시가있다고 여겨 날이 갈수록 두껍게 매는 풍습이 생겨났다.

나중에는 두께가 너무 두꺼워져 목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당시 몸을 움직여 바삐 돌아다닐 필요가 없는 귀족들에겐 크라바트는

퇴폐와 허영의 상징이되었고 결국 프랑스 혁명 이후엔 자취를 감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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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대학교 무대의상연구소 - 스타일닷컴

 

루이 16세가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참수를 당하고 크라바트는 불태워졌지만

이웃 나라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그 유행을 이어갔다.

프랑스에서는 풍성함과 화려함을 극단적으로 추구했지만

영국에서는 심플함과 가벼움에 더 가치를 부여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넥타이’로 불리게 된다.

영국식 넥타이의 기반을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조지 브루멜.

수려한 외모로 영국 황태자의 총애를 받던 브루멜은 경기병 연대의 기수로 발탁되었고,

이후 황태자가 조지 4세로 즉위하자 그도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시대의 멋남’으로 칭송을 받으며 사교계를 주름 잡았던 브루멜은

 “신사의 의복은 도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기준 아래,

프랑스에서 도입되었던 천박한 사치스러움 대신 절제된 품격의 기틀을 만들고자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이 바로 넥타이.

그는 단순하게 목에 두르던 넥타이에 다양하고 독창적인 매듭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많은 이들이 활용하고 있는 넥타이 매듭의 효시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넥타이 묶는 방식을 전수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막대한 사례금을 지불했을 정도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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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대학교 무대의상연구소 - 스타일닷컴

 

20세기 대량생산 위주의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패션도 점차 간소화, 평준화되기 시작했다.

패션의 실용성 측면이 커져가면서 남성들에겐 드레스 셔츠, 팬츠, 블레이저, 넥타이, 구두

이 다섯 가지가 정장의 공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정장 스타일의 효시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영국의 윈저공이다.

세기의 로맨티스트라 불리는 윈저공은 조지 5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에드워드 8세로 왕위에

오르지만 이혼녀이자 미국인인 심프슨과 사랑에 빠져 왕위를 포기한다.

자유로운 연애 방식만큼이나 그의 패션 스타일 역시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셔츠와 팬츠, 블레이저로 이어지는 세련된 수트와 단정한 넥타이 차림의 그의 패션은

일대 파란을 일으켰고, 일명 ‘윈저공 스타일’로 불리며 클래식의 정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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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대학교 무대의상연구소 - 스타일닷컴

 

넥타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1924년에 뉴욕의 재봉사인 제시 랭스도프가 특허를 받은 디자인이다.

이 디자인은 천을 비스듬하게 재단하여 세 부분으로 나는 것으로

오늘날 세계의 표준으로 여겨지고 있다.
넥타이가 직장인의 대명사가 된 것은 미국의 은행가들을 통해서였다.

J.P 모건체이스앤드컴퍼니라는 미국의 은행에서는 은행원을 뽑을 때 외모를

우선시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하얀 피부와 깨끗한 금발이 은행원의 자격 요건이 되었다.

이들은 좀더 귀족적인 분위기를 어필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단정한 수트와 넥타이를 착용하였는데 이를 눈여겨 본 다른 은행에서도

고객들에게 신뢰감을 주고자 직원들에게 정장과 넥타이를 입도록 지시했다.

이때부터 넥타이가 비즈니스맨들의 상징이자 의무로 자리잡게 되었다.

남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액세서리로 군림하고 있는 넥타이.

호사스러운 귀족들을 위한 퇴폐와 허영의 산물로 시작되었지만

나이와 국가를 초월해 젠틀맨을 위한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잡은 예의와 품격의 아이템.

여자들에게 하이힐과 다이아몬드가 ‘베스트 프렌드’라면

남자들게 있어선 넥타이만큼 가까운 친구가 또 있을까?

 비록 어떤 경우에는 샐러리맨들의 목을 답답하게 만드는

구속과 속박의 상징이 되기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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